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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10-19 16:32
바람을 안은 집 : [순환 901]
 글쓴이 : 양건
조회 : 842  

바람을 안은 집 : [순환 901]

  제주에서 조그만 건축 설계집단을 꾸려온 지도 20년을 얼마 남겨놓지 않고있다.  제주섬에서 건축가로 살아가며 작품이라 이름 붙이기도 민망한 작업 속에 어쩌다 조금 자기 생각을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하면 어김없이 건축가로서의 [나]란 정체성에 심각한 공허감을 느끼곤 한다. 그런 측면에서 건축가가 활동하는 지역이 한정되어 있다면 자신이 속한 주변계에서 건축의 단서를 찾아내려는 의도는 본능적 자세라 할 수 있다.  특히나 제주와 같이 풍광, 기후 그리고 사회 관습 등에서 나타나는 남다름이 분명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세계의 건축흐름에서 지역성논의는 건축의 주류가 불분명할 때마다 대두되는 단골손님이었다.  아마도 요즘의 세계 건축계도 다양한 건축논의가 다층적으로 혼재되어 있는 환경이며 역시나 지역주의 건축이 한축을 이루고 있다. 여러 건축이론가들이 있지만 필자는 지금까지도 케네스 프렘톤과 크리스티앙 노버그 슐츠의 얘기에 매우 공감하여왔다.  [비판적 지역주의]로 대변되는 프렘톤은 지역문화와 보편적인 문명(국가문화)에는 명백한 갈등이 존재하며,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문화는 본질적으로 다른 문화와의 일정한 교류에 의하여 변화되어 간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지역문화란 이미 존재하고 있어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자의식적으로 개화되어 가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므로 지역주의의 개념은 자발적으로 생성되는 것이며, 기후, 문화 등의 풍토적인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에 대한 필연적 수용과 그 변용을 통해 지역문화로 거듭나는 것이라 주장한다. 또한 슐츠는 [새로운 지역주의]라는 개념으로 지역주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즉 주어진 환경의 특성을 항상 새롭게 해석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토착적인 특성으로의 환원이라는 향수적인 개념이 아니라 창조적인 것을 의미하며 모방이나 정적인 보존이 아닌 [창조적 보전]의 시각으로 지역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두 이론가의 얘기에서 지역성의 본성과 지역성에 대한 건축가의 자세 등을 엿볼 수 있는데 결국 지역성의 탐색이라는 시도들이 전통의 대상화를 통한 이원적 틀에 의해서 경직화되는 오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교훈이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서 어느 지역건축의 정체성을 논하는데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식이 전통민가와 마을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닌가 한다. 제주 전통 민가(초가와 울담)의 형식과 배치 등에 대해 이미 여러 건축가들이 다양하게 해석하여 왔지만, 필자는 본고의 주제인 제주의 바람이라는 기후적 특성에 대응하였던 제주민가의 건축원리는 [다공성(Porosity)의 건축]이라 생각하고 있다.

  [다공]의 사전적 정의는 제주의 풍토를 설명하는 데 유용하다. 화산재의 공극은 물과 관계하여 제주섬에서 마을의 입지를 결정하는 요인이었고, 제주 돌담의 허튼 쌓기에서 나타나는 다공성은 제주바람에 순응한 지혜였다. 다공성에는 바람과 같은 기후환경에 대응하여 구성되는 물리적 특성으로서의 일차적 코드와 시간성과 일상성의 축적체로서 이차적 코드가 동시에 공존하는 이중코드(Dual Code)가 담겨져 있다.

  현대도시이론의 철학적 배경으로 자주 인용되는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여러 도시 연구 중에서도 제주와 환경이 유사한 이탈리아 나폴리의 연구에서 「다공성(Porosity)」의 개념을 제시한다. 그가 설명하는 다공성이란 현상사이의 명확한 경계가 모호하여 하나의 사물 안으로 다른 사물이 침투하거나 새로운 것과 남은 것,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의 혼융을 지칭한다. 이렇듯 시공의 경계가 무너진 무정형의 복합체의 요소로서 일상성과 시간성을 다공성의 이차적 코드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이중의 코드로  제주 마을을 살펴보면 다공적 특성은 더욱 두드러진다. 바람의 영향은 일차적 코드로 작동하여 물리적인 환경을 형성한다. 바람길을 다듬는 돌담과  올래길에 의해  마을공간은 구조화 되고 유연하게 접속되며, 하나의 울담 안에 유기적으로 배치된 일자형의 주거동은 바람에 순응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이에 더하여 다공성의 이차코드인 시간성과 일상성이 수세대에 걸쳐 녹아들면 물리적 환경에는 서사적 풍경이 드러난다. 이렇듯 바람이라는 제주의 풍토에서 출발한 건축은 [다공성건축의 집합체」로서 마을의 풍경을 이룬다.
 
  그런데 일차적 코드가 작동하는 방식에는 또 다른 요소인 시대성이 관여하게 된다. 전통의 민가가 돌의 자중과 다공적 특성 그리고 초가의 형상과 공법으로 바람에 대응하였다면 현재의 보편적인 건축기술과 재료는 바람과의 관계에서 건축가들을 자유롭게 한다.  오히려 시적(詩的)으로 바람에 관계할 수 있는 여유가 주어진다.

  다음에 소개하는 [바람을 안은 집: 순환901]은 제주의 풍토를 시적으로 결합하여 제주의 이미지를 브랜딩하는 태생적 운명을 지닌 건축이다.

    제주의 역사 이래 최근 몇 년처럼 자본이 집중되었던 때가 있었던가! 매달 이주민이 1500명, 년 2만에 가까운 인구가 늘어 이제 제주는 인구 100만 시대를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다. 모두들 제주에서의 이상적인 삶을 꿈꾸며 이주해 오지만 막상 제주에서의 생존이란 그리 만만하지 않은 현실이 있다. 문화이주민이란 이름에 걸맞게 이주민들은 기존 제주민에게 생소한 문화적 현상들을 동반한다. [바람을 안은집:순환901]의 건축주 부부 역시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제주의 힐링한 삶을 동경하여 이주해온 분들이다.

    건축을 위한 대지는 제주의 허파라 할 수 있는 중산간 지역으로 한라산의 형세가 그대로 드러난 곳으로, 도립미술관과 일명 도깨비 도로라는 관광지가 인접하여 있다. 이 대지에서 처음 착안된 이미지는 새로운 삶의 터를 찾아 떠나온 노마디언들의 정착지로서 주변환경으로 부터 보호처의 이미지이다.

  Y형상 배치의 각 단부는 주택, 게스트하우스, 카페가 위치하여 자기중심성을 지키고,  중정과 계단 그리고 가벽에 의해 유기적 조직체로서의 전체성을 이룬다. Y형상은 자연스럽게 각기 다른 성격의 제주바람을 품어 안은 세 개의 외부공간을 드러낸다. 각 외부마당은 주차장, 게스트하우스의 공용마당, 주택마당으로의 프로그램이 부여되고  붉은 송이(화산석)의 올래길이 세 개의 마당을 연계하고 건축과 하나 되게 한다.

  중정은 판을 치는 바람에 기를 쓰지 못하고 치이는 빛을 조용히 담아내는 공간이다. 그렇다고 세상과 단절된 자폐적 공간은 아니다. 건축의 각 프로그램을 조직화하는 계단과 위요된 구심성에 의해 거주자들의 교류공간으로 장소화 된다. 건축주와 게스트들 사이에 제주에서의 삶과 인생에 대한 얘기가 별빛 총롱한 밤하늘아래 펼쳐진다. 거주자들의 일상은 삶의 얘기가 되어 중정에 차곡차곡 쌓여가고 다공적 공간을 이룬다.  또한 게스트하우스간의 틈새에는 북쪽에서 중정으로 불어드는 바람길이 있다. 순간적으로 귓가를 스쳐가는 바람결에 중정에 모여 앉은 게스트들은 자신들이 제주 땅에 서있음을 인지한다. 순환901은 제주의 바람을 안은 집의 이미지로 브랜딩 된다.

  전통적인 제주의 지역성은 역사성과 장소성에 근거하여, 세계건축의 보편성과 제주의 특수성을 변증법적으로 통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제주는 지금 개발의 시대에 놓여있다. 제주의 건축가들은 자본의 욕망과 제주환경에 대한 존중의 태도 사이에서 중도(中道)를 탐색해야 하는 동시대적 지역성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성 안에서 ‘바람’이라는 제주풍토의 한 요소는 [다공성]이라는 제주건축의 정체성을 담아내는 다양한 층위의 방식으로 진화될 것이다!